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111절



111.

그분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너희는 이같이 무서워하느냐? 어떻게 너희는 믿음을 갖고있지 않느냐?” 그들은 두려움으로 두려워하였으며, “바람도 바다도 그분께 순종하니 , 그렇다면 이분이 누구신가?” 아고 서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바다 건너편으로, 거라사인들의 지방으로 왔습니다.

[그분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배가 지금 한 배는 아닙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예수님의 탄 배에 있는 제자만 이걸 듣습니다. 적어도 배가 두 대 세 대 정도 되는데 그 배가 드디어 풍랑 가운데 있다가 멈췄을 때 한 배에 있는 제자들만 예수님 말씀을 듣습니다. 한 배에 탄 사도들에게 말합니다. 말씀이 위로의 말씀이 아니고 진리면서도 책망의 말씀입니다.

[왜 너희는 이같이 무서워하느냐?]

무서워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받는 것입니다. 무서워하는 게 정상적인데 무서움에 대해서 책망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물결이 일어서 바다에 가라앉는다면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상적입니다. 정상적인 행동인데 책망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정상적인 행동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들이 교회 갔을 때 설교 시간을 통해서 책망을 당합니다. 그래서 열 받는 겁니다. 밖에서는 좋다고 인정받는데 저 목사가 나를 비난해라고 받으니까.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잘못된 것입니다. 기준의 잘못! 자기가 과거에 대기업이 다니고 남들에 비해서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책망받으니까. 속으로 화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몰라보고 인간이 생각은 모두 인본적입니다. 모든 생각이 먼저입니다. 어릴 때부터 칭찬받았고 남들 앞에서 위치해 있었고...... 그건 우리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우린 다른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제 목소리를 망가뜨립니다. 그게 제가 9년 전에 목소리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나는 내 목소리가 하나님 앞에 도저히 영광 돌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같은 찬양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을 해왔지만 그런데 아닌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목소리로 영광 못 돌려 난 찬양 부르지 않을 거야.” 라고 목소리 자체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저는 기도하는 것이 영광 돌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만 했을 뿐이지 내가 찬양한다고 하나님 영광 받으실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사람들이 찬양 잘한다면 사람들이 볼 때 잘한다는 것이지. 하나님 기준에서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성경은 하나님 기준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우리끼리 내 생각에 어떤 것을 정해놓고, “니가 옳다하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자부심도 생겼을 것입니다. 예수님 풍랑을 끝내버리시니 놀라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우고 절제하고 했으니까. 그런데 곧 바로 예수님은 왜 무서워했냐라고 책망하십니다.

[어떻게 너희는 믿음을 갖고있지 않느냐?]

우리는 살면서 두려움을 경험할 때 책망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이 엄청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당할 때 두려움이 결코 정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정상이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정상이 아닙니다. ? 무서움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믿음이 없느냐?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데 믿음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게 책망의 이유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만약 너희들이 이 시간에 순간에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영광 돌렸으면 하나님 기뻐하셨을 텐데 그런데 기쁨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믿는 우리에게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나에게 원하는 기대감에 부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할 때 이렇게 마음먹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안 되면 하나님이 실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우리가 부모님 입장에서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왜 합니까? 기대감 때문입니다. 안 되면 마음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왜 애를 낳고 투자하고 과외 가르치고 수고했는데, 학교에서 낙제하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많은 투자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의 투자처입니다. 투자했는데 이 순간에 기대치가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군중들은 어쩔 수 없지만, 제자들에게서 모든 것을 버릴 만한 믿음을 주시고 순종의 마음을 주시고 신앙을 주셨는데 테스트를 위해서 풍랑을 일으켰는데 그때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풍랑을 꾸짖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는 사항에 도달하는 것인데 믿음이 어렵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어제 히브리 공부할 때 참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스마엘이 죽은 다음에 그 자손들이 어디에 살았느냐? 하윌라서부터 수르까지 되어 있습니다. 수르가 애굽 앞의 수르입니다. 그다음에 수르가 어떤 곳이냐면 앗수르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앗수르는 먼 곳이죠? 앗수르는 형제들에 대해서 아주 떨어진 앗수르, 떨어뜨리는 앗수르입니다. 놀랍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을 앗수루에게 당하는데 왜 이스라엘이 당합니까? 열지파가 유다라는 지파, 천국 가는 지파에게 경계심 내지 질투가 있습니다 또 유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게 됩니다. 천국가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서 경쟁심, 시기심 때문에 믿음이 파괴되는데 이삭이라는 천국 가는 사람에 대해서 시기심과 경계심 때문에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스마일이 지옥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 결국은 이삭이라는 천국 가는 사람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 때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것은 똑같이 현재는 앗수르 옆에 있지만 수르가 지금은 나중에는 거꾸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곳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한 형제였는데 이삭과 이스마엘은 형제였죠 이복 형제입니다. 형제인데 나중에는 공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스마엘에게도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떨어진 것입니다. 왜 떨어집니까? 하나님 자녀에 대한 경계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각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믿음을 준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받은 것을 까먹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하갈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뭘 잘못했지라고 하겠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심판의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를 불로 지옥으로 던지려면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근거 없이 행동하시겠습니까? 불에 왜 던져지느냐?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인간이 까먹는 것입니다. 믿음을 아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 깨우면서 우린 멸망합니다 라고 불신에 꽉 차게 됩니다. 순간적으로나마 물론 순간의 사건이지만 이것이 연속되면 지옥 판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꾸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우리야 제자들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화가 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큰 책망받습니다. “너 왜 믿음이 없어?” 우리가 볼 때는 와 대단한 건데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사항이 다릅니다. 이곳까지 올라와야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준까지 올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책망 들으면 교회를 떠납니다. ? 딴 데가면 대접받으니까요 딴 교회 가면 장로이고 목사이고 안수 집산데 뭡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준을 자꾸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모든 사고와 모든 체질이 하나님 선으로 가야 합니다. 드디어 책망당할 때 말합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했습니다.]

자 드디어 책망 나오자 드디어 큰 진짜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바다도 바람도 그분께 순종하니 이분이 누구신가 드디어 제자들이 교훈을 받았습니다.

[바람도 바다도 그분께 순종하니 , 그렇다면 이분이 누구신가?]

내가 메시아라고 따라다녔는데 바다와 바람이 잔잔해지다니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신가? 이들이 처음부터 몰랐습니까? 알았습니다. 알고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나를 치료하시는 분 도와주시는 분 많은 고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면 가장 정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기준에 도달돼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 왜 믿느냐 무슨 말 합니까? 우린 그런 말 합니다.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해 주셔서라고 말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내 얘기가 필요합니다. 내 얘기 지금 제자들한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를 바람과 바다에서 건져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누굴까요? 나를 과거에 수많은 죄에서 건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수많은 죄악을 사해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 누구십니까 수많은 질병에서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 인제 스님을 따라갈 때 많은 경험들을 얘기합니다. 경험들 그래서 믿음이 고백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 남들이 하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얘기가 아닙니다. 내 얘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누굽니까 각자 마음속에 사랑의 대상이라고 술람미 여인은 말합니다. 내면적인 각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드디어 이들은 예수님이 어마어마한 풍랑에서 건져주신 분이라는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서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바다 건너편]

건너편은 군중들이 있던 곳입니다.

[귀신들린 거라사인들의 지방으로 왔습니다.]

아주 악조건에 왔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이 아닌 믿음이 없는 곳으로 온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왜 예수님을 재주들을 뺑뺑이 돌리십니까 다른 형태의 군중입니다. 앞에 있던 군중은 가르침을 받으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아닙니다. 여기는 귀신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방 지역입니다. 복음방해 지역입니다. 방해 지역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난코스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이런 환경을 만나게 할 거 할까요? 왜 어려운 난코스를 만나게 하십니까? 그것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해서 영적인 역량을 키우게 하는 것입니다. 역량 강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 역량이 강화됩니다. 쉬운 문제 풀면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학 문제 골치 아픕니다. 저도 한번 기억이 있는데, 수학시간 첫 시간에 오래전에 저보고 선상님이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풀라 하셨죠. 그리고 교탁에 앉아서 책을 읽으시고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하 한 시간 걸려서 답을 냈습니다. 한 시간 내내 풀이한 것입니다. 다 친구들은 쳐다보고 있고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처음 봤습니다. 하 한 시간 꼭 걸렸습니다. 그다음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그걸 푸는데 1분이 안 걸렸습니다. 1분이 안 걸리는 문제를 저는 한 시간 걸렸습니다. 왜요 모르니까요? 공식을 모르니까 한 시간 걸려서 풀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운 문제 어려운 사람 만날 때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내가 왜 그런 걸 당해 왜 이런 일을 왜 해 아닙니다. 그게 필요합니다. 그런 난코스를 만나고 어려움을 풀어야 다음이 쉬 다음 문제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많이 당한 사람들은 인생이 쉽다 그럽니다. 그렇죠. 어렵지 어려움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이 어렵다고 합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사도 들러서 역량 강화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역이건 인생이건 어려움을 만날 때 어려움에 대해서 좌절하면 안 됩니다. 우리 역량이 강화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지혜가 느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더 발전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주저하고 도망가려 합니다.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어둠에 맞서서 해결하고 풀고 이뤄내야 합니다. 그러면 그만큼 영적으로 역량이 강화됩니다. 어떻게 영이 세질 수 있습니까? 마귀와 싸움 싸워서 이기죠 귀신과 싸워서 영이 세집니다.

싸우는 거 강화되는 시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즐겁게 맞아들이고 제자들을 예수님이 훈련시키고 밤낮 훈련시킵니다. 우린 제자 아닙니까? 우리도 제자들입니다. 우리도 군중들 만났다가 뺑뺑이 치다가 난코스 만나고 훈련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고정이 없이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서 개발하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역량 강화를 위해서입니다.

한 명은 10만 명을 먹여 살립니다. 미국은 한 명이 1000만 명을 먹여 살립니다. 미국이 잘 사는 이유는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에는 극소수의 엘리트가 있습니다. 극소수의 엘리트! 그 엘리트가 미국을 살립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합니다. 흑인들 정말 무식합니다. 타임지 하나 읽지 못합니다. 글도 모릅니다. 진짜 무식하고 아는 것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잘 사느냐 그 소수의 미국의 한 명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계도 똑같습니다. 한 명의 뛰어난 지도자는 많은 영혼을 살리고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을 고수가 되게 하기 위해서 훈련시킵십니다.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고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변에 많은 영혼들이 올라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 때문에 1001000명 만 명 10만 명이 구원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케일을 넓게 잡아서 이런 스케일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 사무엘 한 명 때문에 이스라엘에 블레셋이 쳐들어오지 못했습니다. 40년 동안...... 완전 고수 아닙니까? 이런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케일을 높여야 합니다. 높여서 심는 것 어려운 것 난코스를 맞아들이면서 내가 역량이 강화되어서 사무엘처럼 이스라엘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과 세계를 구하는 자가 되야 됩니다.

옛날에는 모세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도 모세가 엘리야가 필요합니다. 한 명이 수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당할 때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스스로를 개발하고 역량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미국처럼 부강한 영적인 나라가 되고 마찬가지로 영적인 부강한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그 한 명이 각자가 돼야 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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