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109절



109.

그분은 고물에 베개를 대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멸망하는 것이 당신에게 관심없으십니까?” 그분이 깨셔서, 바람을 꾸짖으셨으며, 바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하라, 잠잠하라.”

[그분은 고물에 베개를 대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시죠. 고물이 생소한 단어입니다. 배가 있으면 앞쪽 이물과 뒤쪽 고물에 해당하는 부분이겠죠. 베개를 대고 주무셨습니다. 배의 약간 높은 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누우신 것이죠. 한쪽 끝에 계신 것입니다.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물이 쏟아지는 상황인데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말합니다.]

1 현재형입니다. 말할 때 이 말이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들은 제자들인데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선생님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이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주로 따랐던 사람입니다. 메시아로 알고 따랐던 제자들이 위기의 순간에 돌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다 꺼져버린 것입니다. 믿음의 파산 직전이 있는데, 믿음이 망가진 것입니다.

우린 생각할 때 내가 예수님을 오래 믿으면 믿음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이삭이 브엘세바에 살다가 브엘라헤로이로 떨어지게 되고 브엘라헤로이는 브엘세바 밑에 네게브 밑에 가데스 밑에 그랄보다 못한 지역입니다. 더 안 좋은 곳으로 이삭의 신앙이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을 오해하면 안 되는데 우리 신앙은 좋은 것이 유지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어려운 이유는 구원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구원에 도달되어도 쉽게 추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이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인데 성경에는 구원이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만 가나안 땅이라고 구원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삭이라는 놀라운 사람조차도 브엘라헤로이로 떨어지게 되는 장면이 나오죠. 계시 신앙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듣고 보는 것을 신앙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항상 환상을 보고 예언 듣는 정도가 구원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구원은 변치 않습니다. 미혹되면 하나님을 듣고 보는 것을 신앙이라고 알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환상이나 예언이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입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우리가 아틀란타 베다니에서 설명을 드렸죠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드리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기쁨을 드리는 존재 상태, 이 상태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기쁨을 드릴 때 구원이 유지되는 것이고. 이것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멸망하는 것이 당신에게 관심없으십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항상 주님이라고 불렀던 이들의 믿음이 떨어져서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열 받으셨을까요? 그깟 쓰나미 하나 때문에 믿음을 다 까먹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일이 안되고 파산되고 인생의 풍랑이 오니까 믿음이 다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천국 갈까요? 지옥입니다. “하나님 무심하셔라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면 안 되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때 공의로 대하십니다. 공의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룰에 맞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법이 하나님 룰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친해도 죄를 지으면 법관은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유죄 판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선이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기쁨을 주시는 자에게는 무죄평가를 내리고 반대는 유죄가 됩니다. 지옥입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드리는 자에 대한 결과물인 것이고. 땅에서 고통을 드리면서 천국 바라는 것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지금 죄를 짓고 구원해 주실 거야.”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기쁨을 드리는 스토리가 성경 스토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천국 가는 사람의 스토리인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고 믿음이 없이는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죠. 이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맨날 들었다 봤다. 지옥 갔다 천국 갔다그게 본질이 아닙니다. 그거 구원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뜻을 수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이 계신 것이고.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뜻을 수행하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만이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외에는 모두 다 타락했습니다. 노아만 의인이었습니다. 노아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제자들이 그렇게 열정을 갖던 신앙이 붕괴되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시발점입니다. 지금 배가 파선되는데 죽는 것이 아니라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멸망은 지옥입니다. 지옥! 제자들은 예수님을 천국의 가이드로 믿고 따라왔습니다. 제자가 되었습니다. 명령에 순종했었는데 상황은 배가 침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불신이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배가 파선되는 것을 보니까, 내가 잘못 알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파선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배가 갈릴리 호수에서의 배가 침몰은 믿음의 파선입니다. 드디어 멸망당한다. 나는 지옥가네요. 선생님!’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정상이라면 주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뭡니까? 드디어 예수님이 선생님이 되어 버리고 지옥 간다고 믿음이 파선된 상태까지 온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핍박과 환란과 어려움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공격받고 넘어갑니다. 마귀는 1차 공격이 핍박과 어려움입니다.

우리 마음은 낙심이 됩니다. 어떻게 됩니까? “내가 잘못 믿는가 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봐하고 정체성에 혼란이 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따라가는데 고통이 온다 이 산이 아닌가벼?’ 이라고 농담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아닌가 보다 잘못 선택했나 보다 믿음이 파선됩니다. 그리고 구원에서 이탈됩니다. 그 전에는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탈이 많은 것입니다. 믿음 세계에서 실족이라고 하죠. 실족이 실제로 정말 많습니다. 처음에는 믿을 만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왔는데 예수님이 주무신다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주무실 수 있을까? 온갖 상상이 오고 불신이 옵니다. 드디어 멸망한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깨셔서]

불신적인 기도에 대해서도 깨셨습니다.

[바람을 꾸짖으셨으며]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었습니다. 욕하는 것입니다. 꾸짖는 것은 바람을 꾸짖을 수 있을까요? “바람아 이놈의 자식 이게 어디 감히꾸짖었습니다. 바람에게...... 바람에게 인격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람의 배후에 있는 마귀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풍랑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면 많은 풍랑이 옵니다. 모두 다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마음의 풍랑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풍랑을 줍니다. 구원을 잃게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모든 고통들은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면서 풍비박산 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이...... 뭐하기 위해서 얘를 지옥으로 인도해야 되는데 믿음을 꺾기 위해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왜요? 바람을 통해서 침몰하면 믿음이 없어지니까. 그리고 지옥으로 가니까......

마귀는 누구냐? 마귀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왜요? 지옥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죠 그게 마귀의 존재 이유입니다. 마귀는 원래 악한 놈들입니다. 마귀는 악의 정점입니다. 마귀들은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모든 악의 뿌리는 마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들이 지금 지옥 끌고 갈려고 풍랑을 일으켰고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에 어려움 당할 때 마귀를 꾸짖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거 아닙니다. 마귀가 일으킨 것입니다. 마귀를 꾸짖어야 합니다.

[바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셨죠 그런데 이 자연계가 하나님의 소관이죠. 우리는 이 자연계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 믿는 구원받은 사람은 자연계를 다스릴 파워가 있습니다. 그런 얘기 많이 합니다. 비가 와야 하는데 비가 안 오는 지역에 그렇죠. 그런데 이런 말 합니다. 엘리야가 내 말이 없으면 우로가 임하지 않으니라 내가 말하면 우로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참된 구원자입니다. 아합왕은 거짓 크리찬입니다. 이 자연계에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한 말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감동이 임해서 한 말이죠.

우리의 말은 자연계를 지배합니다. 우리는 동물들을 말로서 가르칩니다. 앉아,엎드려, 기다려, 가르치죠 자연계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순종이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 의해서...... 구원받은 성도가 많은 지역은 자연계가 아름다워집니다. 좋아집니다. 불신자들이 있는 곳은 지역이 황폐하게 됩니다. 아프리카 황폐하죠. 중동 황폐합니다. 얼마나 황폐한지 모릅니다. 인도 황폐합니다. 중국도 황폐합니다. 믿는 자가 많은 동네는 자연이 좋습니다.

[조용하라 잠잠하라]

드디어 마귀를 꾸짖고 자연계에 조용하라고 명령합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이제 그만 역사하라는 것이죠. 마귀와 모든 자연계가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누구 권세로? 예수님의 권세이죠. 그러나 이 권세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풍랑이 일어날 때 풍랑에 대해서 명령하고 우리는 또한 그것을 지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계 마귀들이 역사합니다. 우리는 안에서 제압하고 잠잠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스림의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는 인간계와 자연계 대한 권세가 있습니다. 원래 믿음의 세계에는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꾸 써야 합니다. 우리 때로는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서 염세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안 돼, 잘 안 돼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반쪽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가난이라든가 어려움을 해치고 나갈 힘이 있고 부요함을 이을 만한 힘도 있고 우리 안에는 이런 것들을 정복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파워풀한 존재입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가 쓰는 것입니다. 자꾸 능력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당시에 바람을 잠잠케 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똑같은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때 예수님과 지금이 다른 예수님입니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다면 가짜고 사이비입니다. 같은 분이라면 똑같이 자연계의 역사하는 어둠에 대해서 우리가 선포할 수 있고 똑같이 자연계의 자연계를 다스릴 힘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토요일 날 안대기도 하는데 성도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술람미 여인이라고 이야기했죠. 기분이 좋았죠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마음의 풍랑 때문에 이분이 죽을동 살동 했었죠. 마음의 풍랑이 지배된 것입니다. 이 마음의 풍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마음의 풍랑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마음의 풍랑이건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이길 파워가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찬양하지 않습니까? 그 권세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고 극복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고 왜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우리는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능력이 아닙니다. 의를 행하고 죄를 이기고 순교의 고통도 감당하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예수 안에서 믿음 안에 사는 것이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리느냐? 우리 이성으로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통치하시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받은 자에 대해서 적용되는 말이고 거듭난 자에게는 믿음의 세계를 가르치는 훈련이 구원받기 전에 또 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면서 내가 안 된다는 것 그것은 불신이 섞인 것입니다. 못한다는 것 섞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능력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처럼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 대해서 명령하셨는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 이제 그 예수님의 능력이 오늘날도 우리는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일어나는 풍랑에 대해서 어려워하지 마시고, 우리가 살면서 때로는 질병의 고통 마음에 일어나는 풍랑의 고통 환경의 어려움 번민과 슬픔에 의한 고통들 많은 물질적인 고통들 이 올 때 우리는 그런 것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이기겠습니까? 누가 이기겠습니까? 우리는 능력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 같으나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제 내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의 힘은 안 됩니다. 내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성격이 소심한 사람입니다. 저는 설교를 할 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스스로를 압니다. 저는 처음에 마태복음 1절을 할 때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아시죠.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게 제가 설교하는 설교의 첫 스타트였습니다. 처음 개척했을 때 14일이었습니다. 처음 했을 때 예배드리는데 난 설교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게 제가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론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하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하고 설교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당시에는 아예 아무 생각 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침에 설교 시작하기 직전입니다. 직전에 1분을 안 남기고 예수님 뭐 해야죠?” 그러면 감동이 옵니다. 무엇을 전하라고 감동이 옵니다. 이런 맛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냥 3, 4명 있습니다. “말씀 보겠습니다.” 하기 직전에 감동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제목을 말합니다. 내용도 없습니다. 말하고 설교를 하는데 당시 권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처음 예배 때 이렇게 귀한 말씀을......”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이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할 때 뭘 연구를 하지 않습니다. 항상 직전에 예수님하면 딱 답이 옵니다. 지금도 전도사님은 그때 설교를 못 잊는다고 합니다. 너무 은혜로웠다고......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렇게 은혜로웠답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나를 의지하면 준비를 하죠.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를 의지하는 것을 배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진행할 때 지혜를 쓰는 것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닙니다. 자꾸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입니다. 종이 주인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것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준비를 해서 설교합니다. 지식 전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건 능력이 아닙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변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지식만 전할 뿐입니다.

우린 예수님을 모든 부분에 있어서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이렇게 도움을 청구하시라고 똑같이 조용하라 잠잠하라는 것은 감동을 그 입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 것이고. 실제로 바다가 잠잠해집니다. 승리의 날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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