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66절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66.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나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갈릴리에서와, 유대에서와, 예루살렘에서와, 이두메 및 요단 건너편에서 그분을 따랐습니다. 두로 및 시돈 주변에서 많은 무리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분에게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나셨습니다.]

바다는 갈릴리바다죠!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을 멸하려는 때에 도망하셨습니다. 복음전파의 과정에서 많은 공격이 있는데 이에 맞서려는 마음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방해하는 마귀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데 왜 방해가 올까?’ 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뜻대로 행한다고 나를 밀어주는 분은 아니십니다 반대파를 없애지 않습니다 우리 구도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는 피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계속 대응하면 잡혀죽습니다 세례 요한도 순교당했습니다 사역과 복음을 위해서 때로는 물러날 필요가 있습니다 물러난다는 것은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가 갈릴리에서와, 유대에서와, 예루살렘에서와,이두메 및 요단 건너편에서 그분을 따랐습니다.]

갈릴리바다는 은혜의 바다입니다 갈릴리바다는 확 트여진 풍경이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은혜의 메카죠! 이두메는 사해의 왼쪽이고 요단은 사해의 동편이죠! 예수님께서 물러남에도 소문을 듣고 전 지역에서 무리들이 몰려드는 장면입니다 사마리아를 제외한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몰려드는 것입니다 

[두로 및 시돈 주변에서 많은 무리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분에게 왔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아셀지파 지역으로 이방지역입니다 복음전파가 왕성할 때 한쪽에서는 핍박이 오고 한쪽에서는 복음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옵니다 당연히 예수님 소문을 듣고 옵니다 많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왜 왔을까요? 병을 고쳤기 때문일까요? 설교가 좋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광고를 잘 해서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오게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할 때 내가 어떻게해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어필시켜야겠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들은 진짜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적들의 공격 때문에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났습니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놀랍게도 사람들을 오게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가버나움이었다면 무리들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벳새다 주변이니 수용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공격이 있을 때 또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바다라는 새로운 부흥의 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흥에는 틀이 필요합니다 부흥의 틀은 때로는 이동하고 도망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틀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안디옥 사역에 성공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세 번의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로마에서 큰 부흥의 폭발을 일으키죠 

현재가 불안하고 위협당할 때 다른 부흥과 또다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새로운 장을 열때가 있습니다 이때 위기라든가 고통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아야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면 좋지만 그렇지않아도 다른 길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장소의 이동이나 매체의 변화 예배형태의 변화 등 이런 모든 변화의 시도가 많은 발전을 주게됩니다 

우리가 안대기도회를 시작한 지 일년이 지났습니다 이것이 많은 영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를 예로들면 우리는 외부의 공격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곧 마가복음이 출판되고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의 출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히브리어를 번역하고 헬라어를 번역하고 찬송가와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위협 앞에 많은 길들이 열리는 것입니다 더 많은 틀을 가지게 됩니다 사역에 대한 위협과 공격은 또다른 열림에 대한 신호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를 세 번했죠! 그때마다 더 나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공격과 위협 앞에 쓰러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메와 요단동편과 두로와 시돈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복음이 전파되는 은혜가 임하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에 있지만 미국과 전세계의 복음화를 꿈꾸는 것입니다 

어릴때는 꿈이 많습니다 성취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먹으면 꿈이 사라집니다 어디 한군데 정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착은 꿈을 소실시킵니다 내가 기업을 이루니 다른 기업에 대한 꿈을 갖지않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많은 불안하고 불안정적인 요소들이 우리에게 많은 꿈과 비전을 줍니다 문제와 위협을 만날 때 그 위협이 우리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 낙심은 금물입니다 좌절은 금물입니다 나를 충전하는 계기로 삼아야합니다 마치 고난이 올 때 회개로 나가는 것처럼 핍박을 기회로 삼아야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충동을 주고 공격할 때 그 것을 역이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싸움의 기술을 가져야 하는데 마귀의 공격 앞에 난 안된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역이용해서 회개로 나가고 겸손으로 나가서 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논에 그냥 씨를 뿌리면 싹이 나지 않습니다 논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갈아엎어 진리가 순전히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버릴게 하나도 없습니다 잘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영적인 기반을 다져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좋게 바라보는 해석력이 필요합니다 해석력이 인간을 만듭니다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죠 나쁘게 볼 수도 있고 좋게 볼 수도 있습니다 나쁘게 보더라도 좋게 해석하면 어떤 상황이라도 반전될 수 있습니다 원치 않은 일을 만나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면 안됩니다 해석을 바꾸면 됩니다 그 해석이 나를 다시 만들어냅니다 결국 사람은 해석의 차이로 인생이 달라집니다 좋아지고 나빠지고는 환경이 아니라 해석력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이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발병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예상하지만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복음전파가 더 잘되고 위상이 높아짐을 예상했습니다 문제는 내게만 오는게 아니므로 역이용해서 우리에게 호의적인 상황으로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바이러스를 전공했습니다 세균은 항생제로 죽지만 바이러스는 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의 혈청입니다 한 명이 나으면 백명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치료는 누가 바이러스에 걸리면 그 사람의 완치된 피를 뽑아서 치료제를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다 낫습니다 처음 사람은 억울하겠지만 역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으로 인해 수 백명의 사람이 치료를 받게되는 것이니 얼마나 가치있는 것입니까? 지금 내게있는 어려움과 고통과 시험이 나를 극복하게 하는 힘을 주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약을 주는 효과를 주게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불행과 좌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경험할 뿐입니다 그 경험에서 위축되면 끝나지만 역이용해서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남에게 약이 됩니다 

저는 성경을 많이 압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많이 봤기 때문이 아니고 많은 사건과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들이 좋은 것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데 칸트스타일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베이컨처럼 경험을 따라갈 지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험을 능가할 지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를 성경을 많이 알게한 방법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핍박 앞에 우리를 위한 좋은 재료라고 여기고 기회로 삼으면 우리는 세계로 나갈 수 있으며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자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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