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49절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49절 

그분이 그의 집에서 앉아식사하시게 되었으며,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 및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앉아있었습니다, 많은 자들이 있었고, 그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시죠

[그의 집에서] 

마태의 집입니다. 세리니까 돈을 많이 벌었겠죠 집도 컸을 것이고...... 

[앉아식사하시게 되었으며] 

앉아식사하시게 되었으며라고 되어있을까요? 원어가 그냥 식사하다가 아니고 앉다라는 단어와 식사하다라는 단어가 결합된 결합동사입니다. 저는 직역하기 때문에 식사하는것이 아니라 앉아식사하는것입니다.

[많은 세리들과] 

마태가 세리로 오래 있었으니까 친구들이 많았겠고 세리들이죠? 세금수금원! 세금 걷는 사람들이죠 

[죄인들이] 

죄인들은, 세리들처럼 남들이 볼 때 죄인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이죠. 우리나라는 사회계층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 농업, 관공서, 회사원, 군인등, 이렇게 분류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은 분류상 그렇게 분류하지 않고, 종교사회이기 때문에 직업적인 분류보다는 서기관, 바리새인, 죄인등 이렇게 영적인 분류를 많이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죄인이란 자기들이 볼 때 영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칭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다 천국 간다고 그들은 믿고 있죠. 그래서 할례를 받는데, 죄인이라는 단어는 사실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천국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죄가 많아라고 지칭된 사회통념적인 개념으로 만든 것입니다. 죄인이란 것은 성경에서 진리로 이해해서 구분하는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의 개념입니다. 마치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겜성, 사마리아성, 므낫세 지파가 있던 곳이고, 이런 지역이 앗시리아 침공 때 혼혈민족이 되죠

이스라엘은 사실 외국인의 피가 섞였는데, 문제는 그때 신앙이 다 없어지는 때이므로, 유다에 있는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거기 사람들을 개와 돼지로 취급하고, 이방인 취급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천국간다는 믿음은 우리를 능가합니다;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천국에 대한 확신은 목을 벤다해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고, 북이스라엘 중에서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은 100% 지옥간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들을 개, 돼지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와서 감사한다든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얘기를 하면 충격을 받는것입니다. 자기들이 볼 때는 지옥에 간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칭찬하니까...... 이 사람들이 혼동이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군가하는 것이죠. 정신 나갔다는 것이죠. ? 자기들이 믿고 있는 신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죄인이란 개념은 당시 사람들이 볼 때 확실히 지옥 가는 사람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 및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앉아있었습니다.] 

여기 마태도 있고, 마태 친구 세리들도 있고, 죄인이 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습니다. 마태는 지금 부름받는 단계이죠. 여기에 제자는 확실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정도 층이겠죠. 앉아 있었습니다. 많은 자들이 있었고 그외에 동네사람들이 많이 왔겠죠. 잔치가 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잔치를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점심먹고 바로 가죠.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 그래요. 이 잔치는 올데이입니다. 하루종일.....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잔치는 일주일입니다. 굉장히 깁니다. 그 속에 식사하고 놀고 춤추고 하죠. 이스라엘 결혼식은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란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결혼 잔치에서 기쁘게 춤춥니다. 얘기하고, 먹고, 춤추고를 오랫동안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잔치란 와서 인사하고 식사하고 가는게 아니라, 식사하고 여기처럼 가르침을 받기도 합니다. 즉 많은 소통이 이뤄지는 장소가 잔치집입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지만, 이 사람들은 잔치를 통해 소통합니다

[많은 자들이 있었고, 그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마태였죠. 그런데 이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거에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개념이 이제 갈라집니다. 마태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가 있고.....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아니었죠. 부분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군중이라 부릅니다. 부분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집회나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뭐가 다르냐에요. 마태는 온전히 따르는데, 자기 직업도 버리고, 자기의 고향도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따릅니다. 이 차이가 뭐냐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제자와 군중을 나누는 것이고, 이 차이가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나의 주인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드란 단어는 주인이죠

그 당시 로드란 단어는 극존칭이죠. 하나님께 쓸 수 있고, 황제에게 쓸 수 있고, 또 노예가 주인에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나의 주인으로 따르는데, 이것은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소유권을 넘긴 것입니다. 이 소유권을 넘긴 자가 있고 안 넘긴 자가 있는데 내가 가진 모든 것, 재산, 인간관계들, 명예, 자아, 몸뚱아리등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 것을 종이라고 부릅니다. 노예시장 가서 남자든, 여자든, 흑인이든, 이빨을 벌려서 삼천만 원에 사면 그 산사람에게 그 사람은 절대 모든 것에 종으로 살아갑니다. 평생을...... 지금은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노예제도가 있던 불과 3세기 전만 하더라도 노예로 팔려가면 나는 없는 것입니다

! 제자는 뭐냐하면, 자기 스스로가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지기 스스로를 종으로 만든 것입니다, 누구에 대해서? 예수님께 대해서..... 여기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 가운데 제자들처럼 자기 스스로를 종으로 버린 사람이 있고, 부분적으로 따랐는데 종이 될지 말지의 중간단계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군중이라 부릅니다

이 군중은 따르기는 따랐습니다. 그렇죠? 천국 갔습니까? 아니오 지옥 갔습니다. 단어는 똑 같아요. 그들도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옥 갔습니다. 왜냐고요? 그들의 따름은 부분적 따름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인식할 때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말씀 좀 보고, 이것이 천국은 아닌 것입니다

토요일 안대기도할 때 어떤 성도님이 귀에 레이다를 찼어요. 레이다. 안테나가 있고 조심스러운 포즈로 가는데 저기는 똥물이 보이더라고요. 다른 곳은 일반 늪이 보이고, 주위에 약간의 야산이 있는데 야산 뒤에 금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면, “그는 나의 일꾼이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꾼은 그냥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소유를 드린 쉽게말하면 제자란 말입니다. 저 뒤에 금궤가 있어서 가까이 갔는데 금궤에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환상 가운데 그 글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글은 믿음, 소망, 사랑이다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쓰여 있죠.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고 고린도서에 쓰여 있죠. 이분이 믿음, 소망,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게 제자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온전한 소망, 온전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아가페가 항상 있는데, 이것을 발견한 자가 제자인데, 예수님께 우리 모든 것을 다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걸 말하면 광신적이다, 자꾸 사이비라고 하는데 그것은 제자가 아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제자가 아닌 사람이 볼 때는 이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여기있는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다고 하는데, 마태를 보면 한심하게 다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 것을 이해를 못 하는 것입니다. 같이 따랐지만 같은 기독교인 이지만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왜 안되느냐? 자기는 다 따른게 아니니까 자기가 따랐지만 부분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따르는 사람은 내 것이 없습니다. 내 시간이 없습니다. 내 소유가 없어요. 목표가 없어요. 내 뜻이 없어요. 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요? 따르니까! 종이 내 것이 어디있어요? 주인께 다 바쳤는데, 주인의 소유인데...... 그래서 주인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주인이 내가 소유한 전부입니다. 종의 소유가 어디있어요? 종은 소유가 없어요. 오래 살아도 종은 주인 것입니다. 오래살아도..... 종은 자기 것이 없어요. 살아도 주인 것, 죽어도 주인 것, 내가 얻어도 주인 것, 잃어도 주인 것입니다. 쉽게말하면 얻고 잃음에 관심이 없어요. 내 것이 아니데 뭔 관심이 있겠어요

세상 사람들은 집을 얻고 땅을 얻고, 주식에 투자해서 얻고, 다른 사람을 얻고, 자녀를 얻고, 여기서 쾌감을 느끼고 즐거움을 누립니다. 맞아요. 인간적인 즐거움이 있죠. 그런데 주님을 조금 따르는 사람들은 조금 바뀌기 사작합니다. 집을 적은 것을 구하고 헌금을 바치고, 땅을 팔아서 바치고 아직은 부분적 따름입니다. 온전히 따르는 사람은 내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으니까 소유와 상실에 대해서 스트레스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스트레스가 없는 것입니다. 감옥에 가나 편히 있으나 내 것이 아닌데 뭐. 내가 떼부자가 되나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욕심이 없어요

아시다시피 옛날에 교회의 월세와 전기세가 월 80만 원이 나갑니다. 그걸 다 내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떤 우리 성도님들은 한 가정이 월 150만 원을 가져가요. 형평에 어긋나죠. 뼈빠지게 교회를 위해서 일해봤자 소득은 없고, 오히려 설렁설렁 교회생활하고 150만 원을 가져가고.....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 불평이 없어요. 왜냐고요? 일은 24시간 합니다. 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은 아주 작은 이익에 눈을 부라리고 아주 싸움을 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 것이 없으니 그냥 나눠줍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들은 목사가 부자인 줄 알고 더 얻어내려고 고소하는 것입니다. 다 줬는데..... 이런 놈들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즉 불신세계와 군중의 세계와 제자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이 세계가 달라요. 제자의 세계는 신본의 세계입니다. 군중의 세계는 인본의 세계입니다. 불신의 세계는 대화가 안 되는 세계입니다. 이 세 개는 서로 다른 세계이므로 서로 이해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논리라든가 이성으로 납득이 안 되거든요. 계산이 안되니까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소유에 대해서 자유하게 됩니다. 없고 있고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모시는 예수님이 잘 되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왕궁에 있을 때 고민합니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먼저 짓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셔서 자기의 왕궁을 짓게 됩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성전을 짓는 모든 재료들을 솔로몬에게 남겨 줍니다. 왜요? 다윗은 자기가 소유한 왕궁에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것이 있는 사람은 계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계산하면 군중입니다. 제자는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계산하는 사람은 아직 자기 것이 있으니까 계산하는 것입니다. 없으면 계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는사람과 부분적으로 따르는 사람과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때는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가 됐을 때만 이해하게 됩니다. ‘아하! 내가 그때는 온전히 따르지 않았구나! 착각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로드! ‘나의 주여라고 삼창하는 교회도 있죠. 중요한 사실은 원어가 주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주인님이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주인님이 주님입니다. 주인님 앞에 와서 뭘 달라고 합니다. 뭔 종이 달라하냐? 간구를 잘 안 하죠. 저는 거의 간구를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우리 초창기 블로그에 글이 있죠. 우리 기도는 오직 회개기도, 오직 방언 기도, 주기도문의 기도만 하죠.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닌데 뭘 달라합니까? 주님이 내게 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또 달라고 합니까? 요구할게 또 뭐가있어요? 1억이 왔어요. 내것입니까? 아니에요 하나님 것입니다. 옷도 하나님 것입니다. 주시면 입는 것이고 없으면 안 입는 것입니다. 내 소유가 예수님이 되면 그때부터 자유가 오는 것입니다. 아직 안 따르니까 소유에 대해 불평합니다

그것은 아직 따르지 않는 증거입니다. 따르면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합니다. 없으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쉬워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안 주시면 하나님 손해니까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너스, 즉 물복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안 주시면 하나님이 손해가 되니까 주시는 그것이 진짜입니다. 교회에 가려면 돈 있어야죠? 교회에 가려면 가방 있어야죠?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지혜가 있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따르고 일을 하려면 필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것이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잘 따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자녀가 비실비실하면 사업자금을 대줍니다. ? 나는 대기업에서 수천조가 있는데 자식이 없으면 남들보기 창피하죠. 그러므로 날 위해서 자식에게 돈을 지원하고 사업을 일으키게 해줍니다. 즉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날 위해서 살면 주시지 않죠. 날 핏값으로 샀는데 십자가의 피로 나를 산 바가 되었는데 자기를 위해서 산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해라며 밀어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리면 하나님도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주십니다. 건강의 복, 물질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결혼기념일이면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뭘 사오죠? 부모 생일 때 자녀가 뭘 사와야하잖아요? 없으면 돈을 줘서라도 뭘 사오게 하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영광을 받기위해서 우리에게 주신대도요.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내 것이 없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소유가 있으면 마음이 참 불안합니다. 인간의 불안한 마음은 자기 소유에서 옵니다. 내 건강, 그럼 불안합니다. 건강을 하나님께 맞기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고 주님의 종이 되는한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소유로 우리가 얻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면 잔치를 우리가 같이 누리는 것입니다. 인생이 잔치입니다

어차피 마태가 부자이지만 제자들은 얻어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자리의 영광을 같이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주가이며 탐식가인 것처럼 오해받아 비난받으셨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잘 드십니다. 사람들이 대접하거든요. 내가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이 누리는 영광을 같이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것이 있으면 누리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다 드리면 어마어마한 것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내가 하나님께 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움이 우리에게 보너스가 되는 것입니다. 종이 받는 보너스. 난 종으로 살았습니다. 나는 종인데 하나님은 영광을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를 키울 때 보면 압니다. 주인이 케잌을 먹으면 개도 케잌을 먹습니다. 주인과 같이 있으니까......우리가 주님의 종으로 곁에서 주님의 영광을 누린대도요. 주님과 남남이면 자기가 소유함으로 사는 것인데, 그 소유의 영광은 약합니다. 누가 주님의 영광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영광스러워도 주님의 영광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따랐지만 마태의 따름은 종의 따름이고 제자의 따름이고 반대로 여기 모인 사람의 따름은 군중의 따름입니다. 군중의 따름에서 제자로 따름의 변화가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드려도 굶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제가 옛날에 책을 읽었는데 헌금분야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희한합니다. 역사적으로 헌금을 많이 해서 거지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신기하더라고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많이 바치면 쪽박찰거라 생각하지만 거지된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정말 제가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바치면 하나님도 그것을 계산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꼭 필요할 때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악하시지 않기 때문에, 선하시기에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정성을 아시고 100배로 갚아주십니다. 100배란 개념은 산술적인 100배는 아니죠. 수명이 만살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채워주신다는 약속의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바쳤습니까? 인생을 바쳤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상이 있다는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일까요? 우리는 제자의 길을 가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영광으로 다시 되돌려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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