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48절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48절
그가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48절 말씀입니다. "그가 일어나" 그는 마태입니다. 레위.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그러니까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것이 우리는 쉽게 여기죠. 교회 다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고요. 다른 것을 이해할 땐, 뭐 신학 해서 사역 정도. 목회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따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따른다는 것은, 내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게 어려워요. 따르는게. 우리는 따른다는 것이 그냥 어디 가는게 아니라 예전엔 그런 일이 많았죠. '목사님 가정 정리하고 드디어 교회와서 충성할께요.' 그게 아니거든요. 그건 자기가 따르는것이죠.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어려운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예요. 하나님의 뜻이 쉬우면 우리는 따르는 것이 쉬운데, 너무 어려워요. 따른다는게.
왜냐하며는 아브라함한테 "너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가!" 이런거거든요. 사실은. 따른다는게 쉬운게 아니라 좀 어려운거예요. "너, 이스마엘 보내!" 이런거거든요. "자식을 보내!" "너 이삭 바쳐!' 이런거거든요. 우리가 따른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건데 보통 어려운게 아니예요. "모세, 너 애굽 가가지고 백성들 다 데려와. 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 보통 어려운게 아니죠. "여호수아. 너 가나안에서 싸워!" 여호수아가 원래 마음이 여린 사람인데, "싸워서 다 진멸시켜!" "다윗, 너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쫓겨만 다녀!"말이 그렇죠. 쫓겨 다니는 것도, 10년 동안 쫓겨 다닙니다. "너. 다니엘 사자굴에 들어가!" '어우 말이 그렇지.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야 됩니다. "다니엘의 세친구, 너희들 말이야 풀무불에 들어가!" 남들이 우상에게 절할 때 하지마!"
우리가, 따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 어려운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한테, "너희들 다 순교 당해!" 하나님 뜻이예요. 순교 당하는게. 그런게 따른다는거예요. 어려워요. "사도 바울, 감옥에 들어가가지고 편지 써!" 그게 말이 그렇지 감옥이 쉬운겁니까? 2천년 전 감옥은 추운데서 팔에 쇠고랑 찬 감옥인데. 거기서 편지 쓰는거예요. 그게 주 사역이예요. 바울의 주 사역이 전도도 있지만 실제 주 사역은 편지 써서 선교하는게 사역이예요. "요한, 밧모섬에 귀양가! 가서 거기서 계시록을 남겨!"
그러니까 우리가 이 따른다는 것을 이해할 때, 그 뜻을 따르는게 너무 어려운거예요. 뜻을 따르는게. 여기서, "일어나"로 돼있죠. 일어나--, 우리는 마태가 세관에서 일어난 줄 아십니까? 버리는거예요. 버리는게 보통 어려운게 아니죠. 지금까지 해왔던 스타일이 있는데, 그걸 다 버리는거예요. 그래서 뜻을 따라야 되는데, "그분을 따랐습니다."
따르는게 왜 어렵냐하면요, 우리 인간은, 내가 내 맘대로 안됩니다. 우리 안에는, 어마어마한 불순종의 영이 있어요. 그게 귀신이예요. 왜 우리가 천국 못 가느냐? 왜 주님을 못 따르느냐? 우리 안에 귀신이 강하게 있거든요. 이게 우리 영을 지배합니다.우리 생각을 지배합니다. 만약 우리가 내 생각만 있으면 되게 따르기가 편하죠. '예수님 말씀하세요. 따를게요.'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귀신은요, 그 예수님의 뜻을 못 따르게하고, 예수님의 뜻을 막는, 저지하는, 큰 파워가 있는겁니다. 그래서 어려운거예요.
'제자들은 쉽잖아요?' 웃기지 마세요. 어렵습니다. 제자들도. 왜 어려우냐? 그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걸 방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어마어마한 귀신의 영이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이게 예수님을 못 따르게 만드는거예요. 이것이. 이거 어떻게 없앱니까? 우리 안에 있는 귀신을. 어떻게 없앱니까? 우리가 영이 여리면 이걸 못 이겨요. 그러니까 영이 성장을 해야죠. 성장이라는게 됩니까? 성장이라는게? 아니예요. 오래 걸려요. 성장이라는게.
우리가 만 20살 돼야 다 크지않습니까? 사람이. 하루 만에 안 커요. 그 성장을 위해서 많은 내핍생활과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이 누적되어야 됩니다. 성장을 위해서. 그걸로 됩니까? 그것 만으로 되는거 아니예요. 또 회개생활 해야됩니다. 회개생활. 많은 죄가 사함 받아야 귀신이 나가고 약하게 되니까 많은 회개생활이 이루어져야됩니다. 또 실제로 축사가 되야 되는데, 귀신이 나가야되는겁니다.
안에 있는 귀를 막는 귀신, 장에 있는 귀신, 또 위선적인 귀신들, 그게 안에 있거든요. 그게 나가야 되는거예요. 왜 귀신이 우리를 막으니까. 그러니 죄사함이란 것은, 이것은 보통 어려운게 아닙니다. 왜 군중들은 많지만 제자들은 적냐?예요. 그것은, 군중들도 따르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지옥 가거든요. 왜 지옥 가느냐? 그들은 어려요. 그들은 회개생활도 안돼요. 그들은 안에 귀신 때문에 못 따라요. 뜻을 못 따릅니다.
37년동안 기도생활한 그 이0희 권사님이 '권사님 만남교회만 위해 기도하십시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되요. 왜 안 되느냐? 다른 목사들 오면 기도해 주면 돈 주는데, 그 돈줄이 끊기잖아요. 못하는거예요. 결국 지옥에 떨어진거예요. 37년을 기도해도 안 되는거예요. 천국 가는 길이. 제자가 안 되는거예요. 왜 안 되느냐? 결단이 안돼. 왜 안 되느냐? 귀신 때문이죠. 귀신 때문에.
모든 귀신들은, 마귀의 지령을 받죠. 그런데 그게 내 안에 있어. 멀리 있는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안에서 뭐해요 ? 뜻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거예요. 성경에 있는 많은 인물들은 말이죠, 그 전부다 뭐예요? 귀신을 이긴 사람들이죠.
"노아야, 방주 지어! 70년 동안, 120년 동안." 그게 되겠습니까? '진짜 음성인가, 아닌가?' 힘든거 아닙니까? 어려워도 했다는 것은, 제자 어렵습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제자가 되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이거는 겉으로는, 외형적으로는 쉬워요. 외형적으로는. 그런데 본질적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어두움의 귀신들을 다 이기고 따라가야되는데, 자기 생각이 많거든요. 인간은 자기 생각이. 우리 인간의 최대 적은,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 이 내 생각이 나의 최고의 적이예요. 결국 누가 나의 적이냐? 내가 나의 적이예요. 남이 아니예요. 내가 내 적이래도요. 내 안에 내 적이 있는거예요. 내적이. 그러니까 아무리 따라갈래도, 결국은 도태되어버리고 중간에 다 무너지는거예요.
이 강에는 말이죠, 연어들이 막 치고 올라옵니다. 그런데 조그마하면 못 올라와요. 다 떨어지고. 그 폭포를 올라가는거예요. 거꾸로 가는거예요. 거꾸로요. 내 생각에 거꾸로 가는거예요. 그러니까 어렵죠. 제자의 삶은, 이것은 이건 정말 죽음처럼 어려운게 제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일시적으로는 될 수 있어요. 일시적으로는. 그런데 결국은 못합니다. 왜 예수님 주변에 500명이 따라 다녔는데, 예수님 당시에. 그중에 11사도만 마지막 최후의 만찬에서 남아있느냐? 예요. 그렇찮아요? 500명이 따라다녔어요. 그리고 70명 정도가 말이죠, 전도인이었어요. 예수님 주변에. 전도인. 70명이. 그들은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맨 마지막에 11명 정도만 주님 만찬 가운데 거하고, 거기서 구원을 선포 당하는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드디어 순교하신 다음에, 수백명의 군중은 다 사라지고, 500명도 사라지고 120명만 구원받는거예요. 제자의 길은 가는 길이 항상 위태롭고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뜻 자체가 내게 좋은걸 주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치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고난도의 난이도예요.
군대에서 유격훈련, 무슨 뭐 이런 특수훈련 받을 때, 그게 쉬운 것들인가요? 아니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겁니다. 어렵죠? 그런데 그런 고난도의 일들이 제자의 길인겁니다.제자의 길은, 우리에게 좀 쉬운게 없어요. 굉장히 고난도예요. 명령도 고난도고요. 일도 고난도예요. 그래서 직접 우리가 하면서 살얼음 판을 밟는 느낌으로 가게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그 명령들이 끝이 나지 않아요. 계속 있는겁니다. 우리가 CIA라든가 뭐, KGB 또 이런걸 배경으로 한 영화 보면 말이죠, 우리가 미션Mission이 수행되죠. 끝난겁니까? 또 있어요. 미션들이요. 미션이 한도 끝도 없어요. 계속 미션이 주어집니다. 제자의 길은, 그냥 끝났다가 없어요. 내가 목숨이 살아 있는 한, 계속 하나님의 뜻이 존재하고요. 계속 미션이 옵니다. 그러니까 제자의 길은 보통 어려운게 아니예요.
"마태가, 그가 세관에서 일어나서, 따랐다."는 것이 짧은 말이지만 이것이 어려운거래도요. 왜? 마지막에 마태가 어떻게 죽습니까? 나중에. 나중에 순교의 길을 가게 되죠.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리는 삶으로 가는거예요. 내가 잃어버려지는 것.
제가 원래 기도만으로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인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감동 가운데 찬양에 대한 감동을 크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찬양을 하라는데, 이게 참, 답이 안나오는게. 목은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전도사님이 오시기 전에, 2년 전에,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찬양을 그냥, 그렇찮아요? 그 당시 내가 찬양을 하면 얼마나 찬양을 하겠어요? 그리고 누가 알아주겠어요. "찬양을 하라!" 그래서 2년 전에, 목 발성 연습을 하는데, 하루에 1시간 정도 했습니다. 하는데, 기도원 올라가는 때하고요, 또 내려올 때 하고, 또 차에서 하고. 하는데 2년 동안 목에서 매일 피냄새가 나요. 피냄새가. 매일 피냄새가 나요. 그래서 그냥--, 있잖아요? 그--, 곪은 냄새, 그게 매일 올라오는거예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게 통과되고서 어느 정도 목의 구조가 바뀌죠.
'창'하는 사람들은 산에 가서 막 소리 지르구요. 폭포에서 합니다. 저도그런 발성법인데, 그게 목의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안되는 발성법을 갖고 있어요. 발성법이. 이 발성법은 '아 에 이 오 우'가 아니예요. 그냥 구조를 바꾸는 발성법이예요. 그 발성법 때문에 제가 2년 동안 거의 목이 진짜, 매일 피냄새를 맡고요. 얼마나--, 목이 이 칼로, 목을 쑤시는 고통이 오는겁니다. 진짜, 매일 목이--, 말할 수도 없어요. 그 피냄새가 나면서 목을 칼로 쑤시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수행을 위해서 필요한 사항들이예요.
찬양하라고 하는데, 목이 망가진 상태에서 내가 그것을 바꿔야 되는데, 지금이야 소리가 좀 듣기 좋죠. 그나마. 그런데 "찬양하라!"는 명령 앞에 그것을 이루는 과정은, 그것은 '아예 안하는게 낫다.' 는 생각을 많이합니다. 사실 하나님 뜻은 우리가 어떤게 주어져도 쉬운게 없다는걸 전 압니다. 쉬운게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번역의 명령을 주셨죠. 번역이 이게 보통 어려운게 아니예요. 끝이 나지않는 싸움이예요. 번역이라는게. 제가 하는 번역은, 스타일이 그냥 단순한 번역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창세기를 번역하지만 제 스타일은, 거의 완벽해야됩니다. 완벽,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단어, 그 뜻을 찾아서 가는것이기 때문에, 이거 는 정말로 이거는 지루한거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지루함은. 우리가 책상에 앉아서 10시간 앉아보세요. 그 지루함을 버티겠습니까? 인간이. 진짜 지루해요. 번역은 진짜 지루함과의 싸움이예요. 본 걸 또 보고, 본 걸 또 보고하는 싸움들이예요. 싸움의 결국은 4복음서 번역이 나온거예요. 헬라어 번역이......
하나님 뜻은, 우리가 말은 쉬워요. 그런데, 막상 하면 하기 싫어요. 고통스러워요. 지루함이 있고. 정말 칼로 찌르는 고통이 있어요. 제가 하루도 빠짐이 없이 하나님께 기도생활 했죠. 이게 쉬운게 아닙니다. 만날 사람은 많고, 나를 만나자는 사람은 많고, 또 대외적으로 할 일이 많은데, 이걸 다 버리는 일들이예요. 그 많은 사람들을---, 나는 또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걸 다 거절해야됩니다. 수 많은 식사와 무슨 뭐 가자는 얘기를 다 거절하는거예요. 말도 안되는 모든걸 포기해야되고요. 그런데 하나님 뜻을 알기때문에 포기하는겁니다. 쉬운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내가 원치 않는 또다른 어떤 세계에 내가 들어가는거예요.그래서 이 모든 과정 가운데 내게 고통이 오고, 피해가 오고, 아픔이 오는거예요. 거기다 명령 수행할 때 우리에게 뭐 좋은게 주어지는게 있느냐? 물론 있긴 있어요. 하지만요, 흔치않아요. 항상 오해를 받고, 남들에게 늘 핍박 받는게 많습니다. 그렇찮아요? 내가 이해가 되면 편하죠. 그런데 오해가 될 수밖에 없죠. 아, 노아를 누가 이해하겠어요? 그 당시 사람들이. 비도 없는 시대에. 이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을 누가 이해하겠어요? 이해 안됩니다. 이해 안된대도요. 그걸 이기는거예요. 제자란 것은요.
남들의 모든 불신을 이겨야 되는데, 그런데 그게 어려운 것들이예요. 사람들이. 우리가 제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싸움이 있는거예요. 내적인 싸움이 있고, 바깥에 싸움이 있고, 그걸 또 견뎌야 되는거예요. 그러니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 이것이 과거의 구약에 있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거예요. 우리는 신약시대니까. 아니 똑 같습니다. 여전히 어려운거예요. 이 제자의 삶은. 대부분 내 생각과 너무 먼 내용들이 많습니다.
지금이야 내가 찬양하니까, 그 박 경호, 그 사람이 맞다고 하지만, 누가 내 그걸 이해하겠어요? '저 미친 놈 저거, 목소리 지가 다 버려놓고 지가 또 찬양한다고 연습하네.' 누가 이해했겠습니까? 앞으로 저는 목소리 더 좋아집니다. 저는 훨씬 좋아집니다. 목소리가. 제가 하나님께 찬양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저는 그 때 내 나중 목소리를 제가 봤거든요. 뭘 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한 9년 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고 우리에게 그 뜻을 이루려 나아갈 때요, 그 내용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다 피나는 싸움들이 많은겁니다. 하나님 뜻은 굉장히 어려워요. 그 싸움들을 다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그래서 제자는, 군중과 달라요. 군중들은 뭡니까? 하나님이 제공하는 것을 원해서 따라온 것들이예요. 기적을 보고 따라옵니다. 군중들이 기적을 보고. '야. 대단하다.' 군중이예요. '야, 여기 떡이--, 야, 복 받는다.' 군중이예요. '야, 여기 치료 받는다.' 군중이예요. 그거 군중들이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5병2어 끝난 다음에 뭡니까?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그럽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탔어요. 막,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뭐예요? 폭풍이 임하는거예요. 아, 제자가 뭐예요? 제자가? ' 아, 내가 군중 속에 있으면 좋았을텐데, 저들은 그냥 예수님께 떡 먹고,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하는데, ' 괜히 주님 말씀대로 건너가려고 배타는데, 그 고통이 뭐예요? 그 무서움과 두려움과 그리고 폭풍들이 온겁니다. 수많은 환란이 오는거예요. 이것들이. 이게 제자의 길이예요.
아마 그들은 낙심했을거예요. 예수님은 고물에서 잠만 자고있고, 계속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폭풍이 오니, 사느냐? 죽느냐? 하고 우는거예요. 이게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는, 군중과 달라요.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좋은 일 오는게 아니래도요. 영광이 주어지는게 아니래도요. 개피 보는거예요. 사실은. 죽을 수도 있어요. 슬픔이 옵니다. 왕따를 당합니다. 너무 어려워요. 제자의 길은. 그래서 나중에는 ,'믿지 않았을껄' 하는 마음이 드는거예요. 그렇찮아요? 따라갔는데 결국은 남는건 감옥이고 순교예요. 뭐, 그게 뭡니까? 이게 제자의 길이래도요. 남들에게 인정 못 받아요. 말씀 드렸잖아요?
베드로는 그래도 사람들에게 좀 인정 받았어요. 예수님 제자니까. 사도 바울은, 그 흔한 외투 하나 없었어요. 외투 하나. 그게 바울의 마지막 말년이예요. 외투 하나 없이 그 추운 감옥에서 사는거예요. 그게 제자의 길이래도요. 우리가 원하는게 얻어지질 않아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이걸 요구하는거예요. "넌 나를 따라와라!" 예요. 따라오라는게 단순하게 그냥 세관에서 나와라! 그거겠어요? 아니죠. 마태가 마지막 까지 따라오라는것이죠. 제자의 길이란 것은, 순간에 결정 내리는게 아니고. 전 인생적인 결단과 의미입니다. 나중에 뭐예요? 죽을 때까지 가는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래서 제자의 길은, 이것은 사실은, 피나는 싸움이 있는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영광스럽게 여기는거예요. 뭐가 영광스러우냐?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게 영광스러운게 아니구요. 그 제자의 길을 가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체가 영광스러운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요, 우리는 모든걸 각오해야 되는데, 성경에 심지어 "너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가를.....심지어 가족도, 심지어 논밭도, 심지어 모든 것을 다 버린 다음에 오라" 는거예요. 잃어버리는 거예요. 제자의 길이란 것은 모든 결단이 필요한거예요. 모든 결단들이. 우리가 진학할 때, 교수님이 '너 교수하지 말고 평생 목회 해!' 하면 할 사람 있겠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전 하는거예요. 명령이니까. 달라요. 쉽게 말하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없어요. 왜? 그깟 영광을 따라가거든요. 영광을 따라 가거든요.
때로는 옛날에, 하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새벽 2시에 일어나서 3시까지 가서 예배 드리고 또 옵니다. 심지어 일제시대 때 예배드릴 때 말이죠. 지금은 편해가지고 자세가 다 편해요. 그러니까 은혜가 안 임하는거예요. 그런 자세로 무슨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냐? 너 대통령 만나면 그런자세로 예배드리냐?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자세가 글러 먹었어요. 자세들이. 하나님께 나올 때, 자세가 글러먹었고, 뭐하러 오는건지 모르겠어요.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이 대통령보다 못하냐? 너한테. 군중들은 벌판에서,이렇게 팔짱끼고, 허리를 제끼고 말씀 들었겠죠.
제자는 안그래요. 제자는, 예수님이 절대자예요. 절대자. 절대자 앞에 내가 사냐, 죽냐 살아가는거예요. 매일같이 초조함과, 매일같이 두려움과 매일같이 엄습해 들어오는거예요. 제자의 삶이예요. 쉽지 읺습니다. 정신이 번쩍 납니다. 매일같이 고통이 따라오고요. 작년에 우리가 겪지 않았습니까? 그게 제자의 삶이예요. 쉽지 않습니다. 이걸 감당하는거예요. 군중은요? 군중은 거기서 떡이나 먹고, 위안 받는게 군중이예요. 군중들은 지옥가죠.
우리가 천국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제자의 삶은 말이죠. 이것이 그냥 우리가 그냥 말로 해서 그렇죠. 사실 막상 들어가보면 참 어려운 것입니다 이 누가와 마가가 사도바울에게 드디어 붙게됩니다 참 재미있어요
당시 누가와 마가를 누가 가르쳤느냐하면? 물론 1대 사도는 아니죠. 그런데 이들이 복음서를 쓴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사도바울에게 붙게됩니다. 이게 제자에요. 아! 나도 말이야
나도 성경 쓴 사람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누가와 마가가요. 더 빨리 쓰거든요 먼저 성경을 집필한 사람이에요. 먼저 쓴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붙어 다니거든요. 제자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아요 자기 위치가 어떤데..... 하지 않아요.
뭐냐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것에 개의치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명령만으로도 만족하는 거에요 너무 좋은 거에요. 내게 이런 명령이 얼마나 감사한가? 나같은 죄인에게 명령이 감사한 거에요 마태가 왜 따랐을까요?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마태는 죄를 짓고 살았어요. 마태는..... 왜 세리가 되려면 많이 타락해야 되거든요. 어느 정도는..... 그렇지 않습니까? 죄를 짓고 살았어요 나는 귀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너무 추하고 흠모되는데 그분이 나를 따라오려면 얼마나 마음이 감동 될까에요
나 같은 죄인에게 예수님이 나를 오라는데 얼마나 감동될까요? 이것이 따르는 이유가 된 거에요 왜 따르느냐? 어떻게 나같은 죄인을 따라오라 할까? 자체가 놀라운 거에요. 왜 주님을 따를까요? 왜 주님을 따라가야 할까요? 아무 이유가 없어요. 난 인정 받은 거에요. 하나님이 날 따라오라니 인정받은 거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왜 따릅니까? 예수님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에게 날 따라오라는 말씀 자체가 큰 축복인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것이 우리는 평생 주님을 따라갈 이유가 됩니다. 우리가 그런 감격속에서 따라가야 합니다. 누가 나를 알아줍니까? 누가 나를 인정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나보고 따라오래요. 얼마나 레위가 마태가 감격했을까요? 나는 세리! 나는 더러운 죄인인데 존경하는 예수님이 따라오라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그것이 따르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이런 감격이 계속 남아야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고 그것이 은혜가 늦춰지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되고. 그리고 중간에 우리가 낙심하거나 그만두면 안 됩니다. 주의 뜻을 따르는 삶이 멈추지 않아야 되고 그 삶 자체가 영원한 것입니다. 군대장관이 “돌진 앞으로” 하면 군인들이 막 달려죠요. 죽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왜 할까요? 그것은 대장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저 대장이 나에게 명령할 때 신뢰하기 때문에 죽어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영화보면 아시잖아요?.
죽음을 아까워하나요? 안 아까워해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제자는 예수님의 명령 앞에 우리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thddycjf572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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