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46절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46절

그 분이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으며, 모든 군중이 그 분에게 오자,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46절 말씀입니다.마가복음 4장이 되겠습니다. 4. "그분이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으며" 물론 갈릴리 바다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설교하시고, 또 귀신을 쫓아내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쳐주시고, 또 다시 몰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또 이렇게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또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 그러는 가운데 회당에서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이 바닷가로 나가셨다는 것은 제자로의 부르심을 원한 것입니다. 바닷가는 영적 은혜의 산실을 말하고, 은혜를 받는 사람, 은혜를 받는 사람이 제자가 됩니다. 은혜를 안 받으면 제자가 되기 어려워요.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고. 못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이유가 여러가지죠. 은혜를 받는 사람은 받는 체질이 있는겁니다. 은혜는 일방적인 선물이나 일방적으로 주어지는게 아니라 은혜를 받는 체질이 되야 받는 것입니다.

 이런겁니다. 사막에는 비가 안와요. 일년 내내 비가 안와요. 이런 사막에는 비가 쏟아질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나한테 비가 안올까? ' 사막이기 때문이예요.반대로, 대한민국처럼 산이 있고 나무가 있는 곳에는 비가 많이 옵니다. 대한민국은, 비가 많은 곳이예요. 왜냐하면 이렇게 산이 있고, 나무가 울창하면, 비가 올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 곳에서 다시 수증기가 올라가서 떨어지기 때문이예요. 산이 있으면 양쪽에 바람이 부딪치면서 거기서 올라가면서 응축때문에 비가 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나무가 있으면, 거기 나무로 말미암아 수증기가 올라가가지고 쏟아지는거예요.

 , 어떤 사람은 사막과 같고, 어떤 사람들은 산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합니다. 은혜는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지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은혜가 안 임해요. 임하지 않는 이유는 사막이기 때문이예요. 어떤 사람은 은혜가 계속 임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산이기 때문이예요. 그러면 그것이 그 은혜를 결정하는 요인이 마음에 있는데, 우리 마음이 어때야 될까요? 마음이 겸손하게 될 때, 낮아질 때, 은혜는 늘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지않으면 은혜는 임하지않고. 은혜가 간신히 임하다가 또 떠나갑니다. 우리는 높아지면 바로 은혜는 떠나갑니다. 지속적인 은혜를 받는 방법 그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영이 이렇게 항상 살맛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은혜가 없으면 살 맛이 안나요. 뭘 먹어도 뭘 봐도 인생이 살 맛 안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한다면 살 맛이 있습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남들이 알아보고 인정해주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은혜를 입으면, 매일 사람이, 그것은 정말, 그 삶의 어떤 역동성이 주어지고, 어떤 기쁨이 주어지고. 그리고 삶에 대한 만족이 넘쳐나는거예요.

 이 바닷가는, 우리 영적인 세계에서--, 꿈에 바닷가에 가면, 그건 은혜가 임하는거예요. 바닷가에 가면, 멀리 보고, 그래서 바다에서 수영합니다. 은혜가 막 넘치는거예요. 바다에서. 예수님께서는요, 제자를 부르실 때, 선택하실 때, 은혜가 임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체질이 되야지. 은혜는 따로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은혜는 체질이예요. 은혜 받기 위하여 사모하고, 은혜를 갈구하는겁니다. 그리고 겸손한겁니다. 그러면 은혜가 임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늘 임하는 사람이 되는데, 체질이 변화할 때 시간이 걸립니다.

 사막형 사람에서 다시 산지형 사람이 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은혜를 못 받는 체질에서 잘 받는 체질로 바뀌어야되는데, 바뀌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사막같은 교만한 사람이 드디어 겸손한 사람이 되는데, 그게 걸리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뭡니까? 의의 체질로 체질을 개선시켜야됩니다. 개선시킬 때 드디어 그 다음에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제자는, 은혜 받지 못하면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없고, 가짜란 얘깁니다. 성령의 은혜가 없는 사람. 가짜가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쓰시느냐? 누구를 제자로 쓰시고 자기의 사람으로 쓰시느냐? 은혜의 체질이 되야되는데, 그 체질이 변화된 사람을 쓰시는데, 그런 변화를 받은 사람가운데, 우리 가운데 모델이 한 분 있어요. 저는 그 중의 한명을 이00 성도라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이 은혜를 많이 받는 분이 아니예요. 지금도 메마른 가운데 있어요. 그러나 깡마른 가운데 가는 과정에 있거든요. 그걸 귀하게 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은혜가 안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안오는 사람이 드디어 은혜로가는 과정에 변화 받는게 뭐예요? 많은 애씀과 내적인 노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또 은혜가 체질인 사람이 있어요. 그분은 처음부터 은혜가 임하는거예요. 정말 제자같은 분이죠. 처음부터 은혜가 임해요. 올 때부터. 항상. 그러니까요, 그런 분들은 그냥 제자가 되요.

 그런데 잘 안되는 분도 된다는 얘깁니다. 잘 안되도 되는거예요. 은혜란 것은. 제가 은혜 못받는 대표적인 케이스case입니다. 저는, 얼마나 마음이 교만하고, 제가 얼마나 사막같은 체질인지, 저는 은혜가 영 오질않아요.오죽하면 옛날에 목사님들이 절 안수하면서, 바리새인 이라고해요. 하도 은혜를 못 받으니까. 모두가 받는데 저는 못 받습니다. 그게 제 체질이예요.

 바뀌는데, 하루는 저한테 안수하시면서 그 목사님이 '지금 이 청년이 은혜 받지 못하지만 나중에 끝을 알 수 없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많은 은혜가 온다는거예요. 그런 예언기도를 하시는겁니다. 그동안에 답답함이 있었죠. 뭐 회개기도 를 안하나, 기도를 엎드려서 하지만, 그러나 아무 은혜도 받지 않으니까--, 깜작 놀랐는데, 청신호가 온거예요.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저는 그 기도를 받은 다음부터 하나님께 또 간구가 들어갑니다.

어떤 간구를 할까요?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요.'간구를 계속하게됩니다. 은혜가 와야 말이죠.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요.' 메마른 가운데 예배 때마다 은혜를 간구합니다. 옵니까? 1, 2--, 오지않습니다. 그러나 오랫 동안의 나의 간구. 드디어 은혜가 오는거예요. 어떻게 사막에 은혜가 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막일지라도 은혜를 간구하면, 언젠가는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가 오지않는 것은 체질의 문제이고, 설사 은혜가 없는 체질이라 할지라도, 그 체질이 바뀌는 방법, 지속적인 오랫동안의 간구입니다. 은혜를 달라고 간구해요. 은혜가 올 때가 옵니다. 그래서 엘리야처럼 드디어 비가 오는 은혜가 임하는 36개월이 지나서 은혜가 오는, 비가 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막 가운데 있다가 이탈되어서 죄로 떨어집니다. 이것은 딴게 아닙니다. 은혜가 오지않는 경우에 은혜를 갈구하는데 그것이 36개월이 못 미친겁니다. 그 은혜가. 많은 세월 뒤에 은혜가 쏟아지는데, 그런데 그 때 임하는 은혜는 영속적이고 끊이질 않습니다. 계속 은혜가 임합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만 우린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있지, 제자. 은혜 받지않은 사람은 제자를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망쳐버립니다. 하나님의 일을 뒤집어버려요하나님의 일을 막아버립니다. 은혜가 임하지않는 사람은요, 결국은 하나님의 일을 망쳐버려요그리고 거꾸로 하나님께 도전하게 돼있어요. ?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이 바닷가는, 은혜의 세계이고. 은혜 속에 있는 사람을 드디어 보여주는데, " 나가셨으며, 모든 군중이 그분에게 오자," , 은혜 가운데 이런겁니다. 글을 쓸 때 "그분이 모든 군중에게 오자." 라고 쓸 수도 있는데, 바닷가는 은혜의 가운데를 말하기 때문에 은혜 속에서 말씀이 선포되는거예요. 이 말씀은, 은혜가 있는 사람이 선포해야만 은혜가 임하는겁니다.

 과거에 70년대에 부흥회가 엄청 많았죠. 모든 전신주에 '부흥성회'{플래카드}가 다 붙어있었어요. 없는 곳이 없었어요. 전부다 부흥회 가는거예요. 왤까요? 은혜가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 은혜가 쏟아지는 그 때는 말이죠, 그냥 부흥사 분이 강단에서 막 말도 안되는 설교를 해도 은혜가 크게 임하는거예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은혜가 안 임할 수가 있는데, 그냥 아무렇지도않은 설교를 던지기만 하더라도 은혜가 임하는거예요. 왜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나가셨고, 군중이 몰렸는데, 은혜가 쏟아지는거예요. 은혜가. 말씀의 은혜가 쏟아지면 그냥 감동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70년대 부흥회는--, 제가 1년 내내 따라 다녔는데, 돌아 다녔는데, 참 희한합니다. 정말 그 부흥사 분들이 되게 무식합니다. 성경을 안 볼 정도로 무식해요. 희한하게도, 부흥사들이 말씀 끝나고 통성기도하면, 은혜를 다 받아요. 그게 그 개인의 역량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뭐예요? 시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예요. 시대적인 은혜.

모두에게 은혜가 부어지는데, 다 회개가 터지고. 그래서 눈물 안 흘리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 눈물 범벅이 되는거예요. 왜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거거든요. 시대적으로. 그것이 70년대입니다. 지금은요? 그런일이 일어난 경우가 아예 없어요. 지금은, 아무 것도 이런일이 일어나지않아요. 있습니까, 요즘? 없어요. 이게 대환란이예요. 기근이예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이른비와 늦은비가 있어야 되는데, 비가 안와요. 비가. 다시 말하면 지금은 모두가 다 사막화를 경험하는거예요. 영적으로......

 지금은, 지금은 은혜가 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은혜가 임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은혜가 임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왜요? 은혜를 사모하지도않구요. 갈구하지도 않아요. 다 교만해서, 은혜는, 겸손해야 쏟아지는게 은혜예요. 원래. 전부 다 교만합니다. 그렇찮아요? 수십년을 기도생활 한 사람의 말을 믿어야됩니까? 인터넷의 비디오 말을 믿어야 됩니까? 인터넷 말을 믿는게 이 또라이래도요. 어떻게 인터넷 말을 믿어? 그 불신자 말을 왜 믿냐? 그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불신자 말을 믿는 시대예요. 거꾸로. 그런데 은혜가 임하겠어요? 하나님의 사람을 믿는게 아니라 그 불신자, 교회를--, 같지도않은 사람의 말을 믿는대도요.

 지금은. 얼마나 세상이 악하고 타락했으면 말이죠, 지금은, 지금은 신앙에 대해서 말할 꺼리가 없는거예요. 교회에 은혜가 임하지 아니하고, 다 사막화가 됐어요. 다 사막화가 됐고요, 드디어 전 지구상에 사막화가 진행됩니다. 영적으로. 은혜가 임하는데가 없어요. 기껏해 봤자, 천국 지옥 갔다온 얘기들. 은사쟁이들 은사놀이만 하고있고. 그걸 전부로 여깁니다.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내 죄에 대한 탄원과 사함과 각성이 은혜입니다. 그게 은혜예요. 은혜는, 지적인 깨달음이 은혜가 아닙니다. 뭘 아는게 은혜가 아니예요. 은혜는, 나를 깨닫는거예요. 나를 깨닫고 거기서 내가 각성되는거예요. '이렇게 살면 안돼지. 난 잘못했지' 하고 자기에 대한 각성이 은혜예요. 이것이 계속 와야되는거예요.

 지금은 뭡니까? 지금은? 지금은 엉뚱하게 성경적인 하나를 가지고, 그거를 은혜로 아는 시댑니다. 그래서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지금은. 누가 성경을 잘 풀어주면, 어우! 대단하네!.웃기지 마세요. 은혜는, 각성이예요. 그래서 은혜에 기울입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 내가 막 뒤집어지는거예요. 말씀 앞에. 말씀을 아는거 안 중요합니다. 말씀 앞에 뒤집어지는거예요. 그래서 변화되는 것인데,

"모든 군중이 그 분에게 오자,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제가 볼 땐 분명히 우리70년대 기독교처럼 뭐예요? 아마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을 때, 가르침이 뭐예요? 쏙쏙 마음에 들어왔을 것이고 아마 굉장히 뭐예요? 흥분 됐을 것입니다. 은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변화를 주고, 가르침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그리고 가르침 때문에 정신이 번쩍 나는거예요. 그래서 영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 산상수훈이겠죠? 물론 해변가에서 말씀하시는 천국 지옥이겠죠. 가르침은 일반 모델을 통한 가르침이겠죠. 하지만 뭐예요? 말씀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눈이 뜨여집니다. 정신이 번쩍 나요.

 제가 우리 임목사님이 떠나신 다음에 사모님이 예배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뭐가 있느냐면, 하나님께서 만남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이 누가 인도해도 항상 은혜가 임합니다. 임 목사님의 대를 이은 사모님이 그 때 또 엄청 은혜 받습니다. 뭐냐하면, 참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누가 서더라도 은혜가 임하는거예요. 엄청 은혜가 쏟아집니다. 속으로 '어우,사모님이 계속 인도해야되는데,' 내가 속으로 엄청 기도 많이 했어요. 계속 임하니까. ? 내게 은혜가 계속 임하니까. '어우, 사모님 그만두면 안되는데' 그런데 나중에 127일 우시면서 , '사실은 우리교회 넘겨줬다.'. 그 때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비록--, 다른 분은 몰라도 나는 거기서 구원을 받았고, 변화를 받았어요. 나는 예배가 너무 사모됐거든요. 내게 있어 그 예배는, 이것은 정말로 목숨과도 같은 예배였어요. 1시간에 이루어지는 그 짧은 사모님의 그 강해가 나는 거의 뭐 쓰러질 정도예요. 왤까요말씀을 잘 가르쳤기 때문에? 아니예요. 내가 너무 사모했기 때문에. 나는, 얼마나 사모했는지 몰라요. 그 사모함이 너무 극에 달할 정도였어요. 나는 사모님의 그 설교를 항상 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나는 잘못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돼. 한참을 우는거예요. 자기 생명을 드렸는데. 나는 잘 못 살아왔어요. 가슴이 아픈거예요. 나는 그 시간에, 목사님이 성경 읽는 시간이 나에겐 꿈과같은 시간이었어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말씀을 배울 때, 팔짱을 끼고 '한번 해보세요.' 그랬을까요? 아니예요. 저는 압니다. 나는 이들을 알아요. 이들은 저처럼 그렇게 말씀을 받았을거예요. 한마디 한마디 속에서 울고 웃는거예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지금 가르침에 대한 말씀이 있는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으면 드디어 제자가 탄생됩니다. 제자가 탄생돼요. 제자란,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내게 은혜가 임하고 말씀의 결단에 따라서, 뭔가 산순교라는 결단이 선 사람, 결단한 사람이 드디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그 제자는 드디어 말씀으로 변화가 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남들에게 또 가르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아는 자가 하는게 아니라, 제자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는겁니다. 말씀을 아는거 그게 신학교입니다.

 말씀을 행해야 제자가 된대도요. 말씀을 아는 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드디어 제자가 되는거예요. 그래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드디어 남에게 말씀을 가르치는겁니다. 말씀을 아는 세계는, 우리의 영을 오히려 좀 먹습니다. 우리의 영을 좀먹어요. 거꾸로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것이 말씀을 아는 세계예요.앎의 세계는, 얼마나 무익한지 모릅니다.

 저는, 사모님 보다 말씀을 천배, 만배 많이 아는 사람이예요. 그렇찮습니까? 난 말씀을 무지 많이 아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사모님의 말씀 한마디에 난 울고 웃는대도요. 말씀을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래도요. 그 말씀이 쏘시는데, 과연 내가 말씀대로 사는가? 말씀을 우리가 많이 알죠? 과연 내가 저렇게 행동하는가? 그래서 결국은 울고 웃는거예요. 너무 좋은거예요. 사모님이 예배인도해도.

 마치 70년대 제가 중학교 시절에 대한민국에 온통 부흥회가 일어날 때, 그 때 모든 사람들이 목사님이 그냥 부흥사분이 허접해도 잘 따르고, 왜 성도들이 다 울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옥토이기 때문에 그 말씀 앞에 다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부흥 때문에 우리나라도 육적인 부흥이 일어난겁니다. 대한민국에. 그래서 대한민국이 급속도로 성장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해서 잘 사는게 아니라 대한민국이 70년대부터 영이 부흥되니까--, 옛날엔 북한이 잘 살았어요. 70년대는. 북한보다도 대한민국이 잘 사는겁니다. 지금 왜 사람들이 못 삽니까? 지금 영적으로 피폐했기 때문에 못사는 것이고.대한민국이 오히려 몰락상태에 있는거예요.

 영적인 것이 모든걸 주관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모함과 은혜의 열정으로 나아갈 때 뭐예요? 그 때에 제자가 나타나는데, 제자는, 항상 있는게 아니예요. 세례 요한 전에 400년 동안 없었어요. 선지자가. 그렇게 어려운거예요. 제자 이런 계통들은, 항상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야만 탄생되는거예요. 드디어 또 하나의 제자가 이루어집니다. 거기서 전도사가 이루어지고 선지자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모든 기간에 영적 성장이 되는게 아니라 어떤 기간이 있는데, 고 기간에 우리는 확 성장해버립니다. 아주 빨리 성장해버립니다. 왜요? 그 때가 뭐예요? 그 때 말씀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우리는 무한성장을 해야됩니다. 계속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사모할 때 그 가르침이 나의 것이 되고 그리고 거기서 영혼이 구제가 되는데, 어떤 말이 임해도, 어떤 말씀이 선포되도, 울고 웃는거예요. 그 말씀에 자지러지는거예요.

 제가 중고등부 학생회할 때 수련회를 갑니다.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냐 하면, 그 때가 70년대였습니다. 그 때 기도를 하면, 전도사님이 딱 서면 막 울기 시작해요. 울기 시작해요. 그게 그 당시입니다. 뭐냐하면, 말씀 앞에 장난치는거, 이건 있을 수 없는거예요. 자세가 삐딱한건 있을 수 없는거예요. 이건 있을 수 없는거예요. 예배시간에. 얼마나 사모했느냐면, 자세가, 막 달려나가는거예요. 인정 받기 위해서. 앞에 막 앉아요. 그래가지고 전도사님이 설교하며는, 설교 좋습니까? 설교 그저 그래요. 그저 그렇다니까요. 설교라는게. 그런데 그 설교 앞에 막 우는거래두요, 시작할 때부터. 왤까요? 아까 말씀드린 그 은혜의 체질이 되기 때문이예요. 은혜의 체질. 산이 되니까 비가 쏟아지는거예요.

 사막이 되면, 아무 은혜도 안 온대도요. 은혜가 임하지않는거 누구 책임입니까? 설교 책임이라구요? 아니예요. 본인 책임이예요. 본인 책임. 은혜가 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은혜 못 받는 것, 마음이 사막이기 때문이예요. 사막은 비를 쏟아부어도 안되요. 안 자라요. 이집트에 갔는데, 나무가 많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길거리 가로수가 싱그러워요. 끝내줬어요. 가로수는. 누가 그러더라고요. 이집트 정부가 가로수에 물을 매일 준대요. 비가 안 오니까. 그래서 자라는거예요.

 사막은, 물을 대줘도 안되는거예요. 우리 마음의 기본적인 바탕은 은혜체질이 되면, 은혜가 항상 임하는데, 이런 체질로 전향 되야됩니다. 안 오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간구하십시오. 은혜를 달라고. 이제 은혜가 임하면 기도할 수 있고요. 은혜가 임하면 우리는 말씀을 증거할 수 있고요. 은혜가 임하면 우리는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은혜가 엄청 중요합니다. 은혜가. 오늘날 사라진 은혜 회복되야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체질이 우리는 돼야돼고요. 지금 전세계는 은혜의 비가 안와서 사막화 되어있어요. 우리는 거꾸로 뭡니까? 은혜가 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저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누가 설교해도, 어떤 곳에서도 거기서 울고, 자복하고 회개하며 뒤집어집니다

마치겠습니다.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가복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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